“LG에너지솔루션이 참 영리했던 것 같아요. 기업가치는 엄청나게 높여 상장하면서 물량은 조금만 풀고” (연기금 관계자)
얼마 전 한 국내 대형 연기금 관계자가 통화하다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의 말인 즉슨, 국민연금처럼 대형 기관투자자는 무조건 새내기 대형주인 LG에너지솔루션을 살 수 밖에 없는데, 물량은 적으니 국민연금이 다 사들이면서 주가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됐다는 소리입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좀 더 직설적으로 비판합니다. “지난해 대형 공모주 대부분은 공모과정에서 해외 투자자가 몰렸다며 잔뜩 부풀렸지만, 막상 상장 직후에는 해외 투자자는 다 털고 나가고, 국민연금 같은 국내 기관이 다 받아줬습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국부유출 아닙니까”
국민연금은 지난주 기금운용위원회에서 3월말 기준 수익률을 보고하며 국민들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국내외 주식·채권·대체투자를 평균한 전체 수익률은 -2.66%였고, 그 중에서도 국내 주식은 -5.38%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해와 달리 전세계적인 하락장 속에서 해외 연기금도 수익률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내 주식 손실에 관해서는 동종 업계라고 할 수 있는 연기금·공제회의 자산운용 책임자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습니다.
한국거래소 정보데이터 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주축인 연기금은 3일 기준 LG에너지솔루션을 4조 469억 원 순매수 했는데요. 압도적인 1위 매수 종목이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외국인은 2조 6899억 원 순매도 했습니다. 개인도 1조 6317억 원 팔아 치웠으니 국민연금이 외인과 개인이 판 물량 가까이를 사들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연기금 매수금액 기준 2위인 카카오페이가 4032억원으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니 단연 국민연금의 올 상반기 원픽은 LG에너지솔루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LG에너지솔루션의 주가는 10% 가량 빠졌으니 물량으로 보나 하락폭으로 보나 국민연금 국내주식 손실의 ‘주범’을 면치 못하겠네요. 이 기간 국민연금 등 연기금은 삼성전자 주식 2조 9535억원을 팔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주식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이 일부러 삼성전자를 팔고 LG에너지솔루션을 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국민연금처럼 장기 대형투자자는 장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크게는 주식·채권·대체(사모펀드·부동산·인프라 등)에 얼마를 투자할지 정하는 자산배분이 수익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세부적으로 국내 주식 투자에 들어가서도 특정 펀드매니저가 그 때 그 때 투자 종목을 정하는 액티브 전략을 잘 쓰지 않습니다. 벤치마크라고 하는 특정 지수를 기준 삼아 그 흐름과 비슷하게 투자 종목을 편입합니다. 국내에서는 코스피 대형주가 주축인 ‘코스피 200’을 벤치마크로 삼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시가총액이 100조원을 넘어 두 번째로 큰 대형주입니다. 3월부터 코스피 200에 들어왔는데요. LG에너지솔루션의 시총이 코스피200 전체 시총에서 차지하는 비율만큼 국민연금 등이 담고 있어야 코스피200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삼성전자도 팔게 된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게 큰 덩치의 LG에너지솔루션의 유통물량이 지극히 적었고, 기계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을 사들여야 하는 국민연금이나 지수추종 펀드 등이 앞다투어 LG에너지솔루션을 사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외국인과 개인 등의 매도세가 커서 주가는 하락 국면입니다.
근본적으로 거품 공모의 문제를 알고도 눈감은 주요 큰 손들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넘치는 유동성 파도를 타고 상장했던 많은 따상주들이 사실은 허상이라는 얘깁니다. 일단 대형주의 공모과정에서 외국계 증권사를 주관사로 선정하면서 해외 기관투자자를 끌어모읍니다.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은 해외 기관투자자가 대거 몰려들었다면서 마케팅 요소로 활용하죠. 하지만 해외라고 해도 흔히 좋은 투자자라고 하는 대형 장기투자자인지 그저 외국 국적만 달린 먹튀 투자자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관투자자는 상장 후 일정 기간 매도하지 않겠다는 락업(Luck up)을 걸기도 하는데요. 해외 기관투자자는 락업을 잘 걸지 않거나, 걸더라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내 기관투자자의 경우에는 락업을 어기면 앞으로 공모주 투자 과정에서 불리할 수 있지만, 해외 기관투자자는 상대적으로 투자처가 넓으니 얽매일 이유가 적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일부 개인투자자들도 공모에 참여했다가 바로 털어내면서 공모주는 상장 직후 따상을 찍었다가 바로 꺼져버리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 물량의 대부분은 대형주를 사들여야 하는 국민연금, 즉 다수 국민의 노후자금이 떠받치는 상황이지요.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 기관투자자는 한국거래소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반복되는 공모주 거품을 줄이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인데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거래소는 공모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일에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업계 일각에서는 증시 활성화를 원하는 거래소가 구태여 찬물을 끼얹는 일에 적극적일 수 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국민연금의 공모주 매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일단 국민연금은 중기 자산배분 계획에서 국내주식 비중을 2021년 16.8%에서 2027년 14%까지 줄이기로 했습니다. 국내주식 비중 축소와 해외 투자 확대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이어온 국민연금의 기조인데요. 다만 국민연금 자산 자체가 워낙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줄이더라도 규모는 지금보다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지난해 국내주식 투자 비중 확대 요구에 국민연금이 국내주식 이탈 허용범위를 넓힌 것처럼 일부의 여론에 휘둘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음 기금운용위원회에서는 공모주 투자 전략의 변화를 고민해야 할 시점은 아닌지 궁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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