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의 한국 기업 인수 공습이 첨단·미래 핵심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과거 단순 제조업이나 유통업 중심에 머물던 투자 대상이 인공지능(AI), 모빌리티, 신재생에너지, 바이오·헬스케어, K뷰티 등 국가 경제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알짜 자산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국회에서 토종 PEF를 향한 각종 규제안이 논의되며 역차별 논란이 거세지는 가운데 20여 년간 경쟁력을 키우며 국내 산업 구조조정과 시장 발전을 이끌어온 토종 자본 경쟁력이 퇴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6일 서울경제신문 시그널 리그테이블과 PEF 업계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5000억 원 이상 인수합병(M&A) 시장에서 해외 자본이 차지한 거래 비중은 7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서는 이 비중이 더욱 상승했을 것으로 업계는 추정했다. 올 초 프랑스 에어리퀴드가 국내 특수가스 기업 DIG에어가스를 4조 8500억 원에 인수 완료한 것을 비롯해 EQT파트너스가 AI·정보기술(IT) 기업 더존비즈온을 총 3조 2000억 원에 인수했다. 이 밖에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SK그룹 신재생 사업 인수, 베인캐피털의 에코마케팅 인수, 블랙스톤의 퓨트로닉 인수가 성사됐고 TA어소시에이츠의 시지바이오, 맥쿼리자산운용의 가비아 인수 등도 추진 중이다.
최근 아시아 바이아웃(경영권 투자) 펀드만 100조 원 이상을 결성한 글로벌 PEF 운용사(GP)들의 한국 M&A 시장을 향한 공세는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GP들은 통상 전체 아시아 바이아웃 펀드의 최대 20%를 한국 시장에 배정하는 데다 대형 딜 추진 시 인수금융과 공동투자펀드까지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어 실제 투입 가능한 자금력은 더욱 불어나게 된다.
현재 국내 기관 전용 PEF 시장은 IMM·스틱인베스트먼트 같은 순수 국내 GP, MBK파트너스·한앤컴퍼니처럼 펀드 내 해외 투자자(LP) 비중이 높은 혼합형 GP, 그리고 글로벌 GP 등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문제는 펀드를 국내에 등록하고 법적 규제를 받는 토종 GP와 달리 해외 GP는 자본시장법상 감독망을 쉽게 비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7월 이후 총 11건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가 토종 PEF에만 족쇄를 채우는 법안을 강행할 경우 정작 국가 전략자산인 첨단산업의 투자 기회는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해외 자본이 독식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최근 논의 중인 자본시장법 개정안에는 PEF의 차입 한도를 사실상 200%로 제한하는 레버리지 규제와 금융 당국 보고 체계 강화는 물론 운용사 주요 임직원의 보수 보고 의무화와 인수 후 2주 내 근로자대표 통보 의무 같은 규제안들이 잇따라 포함됐다. 결과적으로 한국 자본시장의 경쟁력은 약화하고 해외 자본에만 길을 넓혀주는 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유럽연합(EU)의 경우 ‘대체투자펀드운용지침(AIFMD)’을 적용해 해외 GP라 할지라도 유럽 현지 기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하려면 동등한 감독·등록 규제를 받도록 법제화했다. 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GP들은 자금 대부분을 해외에서 조달해 국내 LP에 대한 의존도가 극히 낮다. 이렇다 보니 자금 모집 경로를 지렛대 삼아 해외 펀드까지 제재하는 EU 방식을 국내에 적용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 결국 해외 GP를 직접 규제할 실효적 수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현재 논의 중인 개정안만 강행될 경우 토종 GP만 일방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는 역차별 구조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국내 기관 전용 PEF 제도는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와 국부 유출 논란을 계기로 해외 거대 자본에 맞설 토종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이후 20여 년간 토종 PEF는 국내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과 첨단산업으로의 체질 개선을 주도하며 한국 자본시장의 핵심 축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아시아의 다른 금융 경쟁국이나 벤처캐피털(VC) 등 타 업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번 규제안들은 공들여 구축한 토종 PEF 생태계 기반을 흔들어 핵심 인력들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박병건 PEF운용사협의회 회장은 “PEF 운용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규제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해외 자본에 주도권을 내주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법안 심사 과정에서 실효성 있는 규제 정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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